처음 가는 길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와본것 같은 느낌이 드는가 하면 매일 다니던 길인데도 낯설게 보이기도 한다. 영화로 치면 나는 후자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차우>또한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봤다. 감독의 전작이 <시실리 2km>라서이다.
시실리... 그때까지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선보이지 않았던 혼합장르가 주는 막나가는 분위기를 잘살린 작품으로 기억한다. 호러와 코믹의 장르를 섞으면서 분위기는 블랙코미디정도? <차우> 또한 혼합장르의 성격을 띤다. 국내에서 제작하면 반드시 망한다는 그 ‘어드벤처’와 액션과 코믹의 믹스매치가 꽤 신선하다. 그래서 이름 한 번 지어봤다. 스파게티 서부극처럼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아 시실리, 삼매리, 등등 작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뻘짓 좀 많이 하시라고.
#한국적 스파게티의 장르로 부른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재 소재가 다르다. 식인 돼지가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 소재자체가 아주 독창적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와 다른점이 있다. 영화에는 생략된 씬 하나를 보자.
S#41. 삼매리, 목장 풍력 발전소
능선에는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고,
고구마를 들고 서 있는 동네꼬마 덕구.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후, 갈대밭이 요동치며 ‘크르르..’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덕구의 앞에서 멈춘다. 수풀 사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초록빛 눈.
덕구 와.. 너 진짜 많이 커졌다. 자주 못 와서 미안해.
다가서며 수풀 사이로 고구마를 내미는 덕구.
덕구 자, 먹어 얼른.. 네가 좋아하는 밤고구마 야.
멧돼지의 주둥이에 고구마를 들이미는 덕구.
하지만, 냄새를 맡곤 주둥이를 돌리는 멧돼지.
덕구 왜, 이제 고구마 싫어? 좋아했었잖아..
...(중략)...
그렇다. 영화에서는 식인돼지에게 인성을 불어넣고 있다. 영화를 보면 초록빛 눈의 식인돼지가 처음부터 사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산속에 식량이 없어지자 시체를 파먹기 시작하다가 내장맛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초록빛눈은 자기 짝인 암컷 멧돼지로 바비큐 파티를 여는 마을 사람에게 적의를 품고, 새끼 멧돼지에게 강한 부성을 보인다. 이쯤이면 사람이다 싶다.
둘째 장소가 다르다. 어딘가 있을 법한 그야말로 촌구석. 비리도 눈감아 줘야할 것 같은 끈끈한 공동체. 삼매리는 시끌벅적하고 정신산만하지만 그런대로 괜찮다. 오히려 영화후반부가 어드벤처가 되면서 산속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매끈해지는 대신에 조금 식상해진다. 마지막에 공장같은 곳으로 들어가면 극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대신에 신선한 맛이 싹....사라진다. 처음에 좀 후져보이는 그 마을회관이랑 파출소랑... 김순경네 집이랑 주말농장을 잘 이용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도 좀 든다.
셋째 사람이 다르다. 얘기가 위의 것과 좀 겹치는데 캐릭터 디테일이 괜찮다. 게으른 파출소 소장, 오지랖 넓은 동네이장, 비리의 온상처럼 보이는 곽사장, 있을 법하나 행색이 이상한 미친년 등등. 처음에는 스토리와 상관없는 미친년의 등장에 약간 짜증이 났으나 영화곳곳에 등장하는게 재미가 꽤 쏠쏠하다. 특히 김순경 뒤에서 따라올때는 정말로 웃겼다.
상당수 관객들이 이것저것 막 비벼놓은 것을 불편해 하는데도 용감하게 이렇게 영화를 찍은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다음 작품에 기대를 걸며 인상적인 씬중 하나를 읽고 책을 덮겠다.
S#58. 삼매리, 마을회관 안(밤)
...(중략)...
다시 한 번 ‘쿠웅~!’ 소리와 함께 강하게 회관 벽에 부딪치는 무언가.
충격으로 깜박깜박 하던 천정의 백열등이 꺼지고, 암흑이 되는 실내.
그제야 노래를 멈추는 수련. 웅성거리는 사람들..
수련 뭐야?.. 정전이야?
사냥개들을 진정 시키고, 슬며시 엽총으로 손을 가져가는 백포수.
한 순간 흐르는 정적..
백포수 엽총을 집어 드는 순간,
‘콰앙!!!’ 회관 벽을 부수고 안으로 뛰어드는 검은 물체.
검은 물체에 들이 받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나동그라 지는 선배.
수련 선배!!!
검은 물체, 어둠 속에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하고, 아수라 장이 되는 회관.
날뛰는 검은 물체에 조준을 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백포수. 스쳐 지나가는 탄환.
검은 물체, 동작을 멈추고 백포수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무시무시한 짐승의 실루엣이 백포수의 시야에 들어온다.
지옥불 처럼 타 오르는 안광..
어마어마한 모습의 야수를 멍 하니 바라보고 있는 백포수.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백포수 쪽으로 걸어오는 멧돼지.
멧돼지, 백포수를 지나쳐 테이블 쪽으로 걸어간다.
테이블 위, 새까맣게 탄 암컷을 입에 물고 회관 밖으로 끌고 나가는 멧돼지.
넋이 나간 듯, 암컷을 끌고 가는 멧돼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포수.
...(중략)...
** 이글은 제가 네이버카페 월간시나리오 [시나리오 읽어주는 여자] 칼럼에 2009년11월에 게재한 바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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